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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 설화 속 착한 아이·나쁜 아이신화 분석

 

 

  12월 말, 1년에 한 번 뿐인 특별한 날 밤, 아이들은 흰 수염을 기르고 붉은 모자와 붉은 옷을 입은 환상의 존재가 자신의 집에 들러 선물을 두고 가기를 바란다.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받을 수 있는 특별한 기회! 하지만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착한 아이일 것. 아이들은 지난 1, 적어도 지난 한 달간 자신이 얼마나 착한 아이였는지를 증명해야하며, 부모님은 이를 환상의 존재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아이들은 자신이 늘 바라왔던, 혹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을 들고서 만족에 젖은 미소를 짓기도 하고 실망을 감추지 못한 울상을 짓기도 한다. 이런 경험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착한 아이, 혹은 나쁜 아이였던 때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의 선물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어 삶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 사회적으로 생각하는 산타클로스의 이미지(좌)와 성 니콜라우스의 초상(우)

 

  1225일이라는 3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이 날짜를 보면 자연스럽게 성탄절이 떠오른다. 초록색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아래에 쌓여있는 아이들을 위한 선물, 그리고 산타클로스도. 너무나 당연하게 떠오르는 이 이미지들은 3-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활동했던 성직자 니콜라우스에서 출발한다. 신부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교가 된 니콜라우스는 이후 사회선교를 확대하고 남들 모르게 선행을 베풀기로 유명했다. 그가 죽은 이후 그의 명성이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11세기 그의 유해를 이탈리아 바리(Bari)로 이전하여 지은 예배당에서는 각종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12세기 프랑스의 수녀들이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126)의 하루 전 날인 125일에 그의 선행을 기념하기 위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던 것에서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나누어 주는 풍습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산타클로스라는 단어는 네덜란드어로 성 니콜라우스를 뜻하는 산테 클라스를 영어식으로 옮긴 것에서 출발하였으며, 19세기 유럽에서 세계 전역으로 크리스마스가 퍼져나감에 따라 영어식으로 바뀐 산타클로스라는 단어 역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유래에서 주목할 점은 따로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의 원형 그 어디에서도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것이다. 산타클로스가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에 따라 전 세계의 아이들을 나누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늘 들어왔기에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환상의 존재 산타클로스만큼이나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나누는 기준은 그 정체가 뚜렷하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선물을 받는 착한 아이들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사실 선물을 주고 말고의 문제는 아이가 착한지 나쁜지로 결정되지 않는다. 착한 아이·나쁜 아이 리스트는 존재 그 자체로 아이들이 착하게굴도록 만드는 하나의 도구일 뿐 어떤 아이들이 선물을 받을지, 선물을 받는다면 어떤 선물을 받을지는 아이의 부모가 결정한다. 아이들이 깊이 잠든 새벽에 선물을 갖다놓는 존재는 다름 아닌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물의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며, 아이들이 착하고 나쁘고에 상관없이 가정환경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착한 아이라고 해서 무조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물을 받는 아이들은 그 아이가 착해서라기 보단 주변 환경이 아이에게 상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착한 아이·나쁜 아이 리스트는 허상이며, 사회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면 그 다음 떠오르는 의문은 착한 아이·나쁜 아이 리스트의 사회적 필요성이다. 왜 사람들은 그럼에도 계속해서 착한 아이만이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선물을 받기 위하여 아이들이 착하게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착한 아이의 정의는 산타클로스나 착한 아이·나쁜 아이 리스트처럼 실체가 뚜렷하지 않으며, 허상에 가깝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또래에 비해 의젓하고, 장난치지 않으며, 제게 불리한 상황에도 불평하지 않고 맡은 일을 스스로 해내는 아이들일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보며 어른들은 아이가 참 착하고 의젓하네요.’라고 말하겠지만 이는 아이가 참 말을 잘 듣네요.’라고 말할 수 있다. ‘착한 아이의 기준은 철저히 어른들에 의해 정의된다. 어른들이 보기에 손이 덜 가고, 신경이 덜 쓰이는 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잘 하고 있는 아이. 반항하지 않는 아이. 착한 아이·나쁜 아이 리스트라는 허상의 이미지는 어른들에 의해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생산되고 마치 뚜렷한 형태를 지닌 것처럼 보이며 사회에서 힘을 발휘한다. 착한 아이·나쁜 아이 리스트는 사실 말 잘 듣는 아이·말 안 듣는 아이 리스트다.

 

 

강요되는 허구의 이미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착한 아이로 있기를 강요하며, 착한 아이로 여겨지는 아이들에게 보상을 하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불이익을 가한다. 하지만 여기서 강요되는 착한 아이의 이미지는 어른들의 기준에서 만들어낸 보기 좋은 이미지들이다. 의젓하고 얌전하며 또래 아이들과 말썽을 일으키지도 않고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아이.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어린애 같다와는 달라 보인다. 이보다는 사회적으로 생각하는 어른의 이미지에 더 가깝다. 성숙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말썽도 일으키지 않으며, 저보다 윗사람의 말을 잘 듣고 제 맡은 바를 성실히 해내는 성인.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이 성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성인이 아이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아이들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아이들은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미성숙한, 불완전한 어른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아이가 지니고 있는 성격, 인지 및 사고과정을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이 자신이 기대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 이를 나쁜 아이로 규정하고 처벌하거나 배제시킨다. 마치 산타클로스가 나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쁜 아이는 사실 나쁜 아이가 아니라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나쁘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임에도. 모든 아이들은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냥 아이들인 것이다. 왜 굳이 이들을 나누려하는가?

 

  어른들이 규정한 나쁜 아이의 범주에는 착한 아이와는 반대로 어른들이 보기 싫어하는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는 아이다. 특히 우는 아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혐오적인 시선은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롤의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다.

 

 

  위의 가사()는 원곡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을 번역한 캐롤 울면 안 돼이다. 나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는 산타클로스의 이야기였던 원곡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번역되는 과정에서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는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우는 아이는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아이라는 것이다. 최근 찬반논란으로 늘 화두에 오르고 있는 노 키즈 존(No Kids Zone)’은 우리나라의 신조어다. 잡코리아가 운영하는 아르바이트포털 알바몬에서 1,200여명의 아르바이트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노 키즈존의 도입에 찬성하는 720여명의 의견 중 약 40%라는 적지 않은 숫자가 아이 우는 소리를 불편해하는 손님이 많아서를 이유로 꼽았다. 아이들은 운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장소에 들어갈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아이들이 우는 데에는 특정한 이유가 있다. 배가 고프거나 볼일을 보았거나, 잠이 온다는 이유로 울기 시작하는 갓난아기부터 주변 상황이 제 성에 차지 않는데 이를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라 갑갑하고 분한 마음에 우는 어린이까지 아이의 울음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고, 대부분의 이유들은 아이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논리적이다. 의사표현을 어른만큼 명료하게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울음은 하나의 의사소통 수단이 된다. 하지만 사회는 아이를 울게 만든 이유를 알아내어 그것을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우는 아이 자체를 부정하며 나쁜 아이로 취급하고 특정 공간에 존재할 자격 자체를 박탈한다. 우리나라에서 우는 아이는 나쁜 아이인 것이다.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받을 수도, 어떤 공간에 머무르는 것조차 허락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를 울게 만든 그 상황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진실이지만, 사회는 너무나 손쉽게 아이들을 나쁜 존재, 벌을 받아 행동을 교정해야 하는 존재로 치부해버린다.

 

 

권력으로 만들어진 리스트

 

  산타클로스의 설화 속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이미지가 언제나 중-노년층 남성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산타클로스는 흔히 산타 할아버지라고 불리며,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의 아버지로 칭하기도 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산타클로스는 성인 남성으로 그려진다. 붉은 옷을 입고 북극에서 요정들과 함께 선물을 만드는 성인 남성은 전 세계의 아이들을 착한 아이·나쁜 아이로 나누어 둔 리스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 리스트에 따라 착한 아이들에게만 선물을 나누어준다. 자신이 베푸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시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들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별하는 기독교 성인 남성의 이미지는 가부장제 사회 속 남성의 권력을 시사한다. 가부장제 사회의 최고 권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가부장제 속 약자에 속하는 아이들의 행동을 평가하고 그에 따른 상이한 보상을 주는 것이다. 이는 사회가 아이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닮아있다. 사회는 어머니와 아이라는 집단이 특정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불편한 눈초리를 보낸다. 언제 어디서 말썽을 부릴지 모르는, 자신에게 분명 민폐를 끼칠 나쁜 아이와 이를 방관할 무개념 어머니.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직까지는 실현되지 않은 일종의 예상에 불과하다. 심지어 여기서 부모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칭하는 것 또한 생각할 부분이 많다.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아이와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고 특정 공간으로부터 배제시키고 권리를 빼앗겠다는 사회의 강력한 의지가 보인다. 그리고 배제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와 아이는 특정 공간에,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스스로 그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것을 기득권층에게 증명해야 한다. 마치 산타클로스에게 자신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산타클로스는 가부장제 사회의 성인 남성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육아에 참여하여 직접적으로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고, 사회에서도 그러기를 강요받지 않는 성인 남성들은 그저 아이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알아서 성숙한 사회인으로 자라난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배워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이는 아이가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 아닌, 시행착오를 겪으며 옆에서 부모가 지속적으로 학습을 도와야만 습득이 가능하다. 하지만 육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이를 알 리가 없다. 육아에 대한 무관심함은 자연스럽게 아이에 대해 당연하게 기대하는 이미지로 발전하고, 이는 곧 성인 남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와 문화에 스며들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성인 남성의 이미지를 가진 산타클로스는 사회적 약자에게 강요되는 이미지, 착한 아이·나쁜 아이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데에 사용된다.

 

 

리스트 너머의 아이들

 

  그렇기에 산타클로스와 그의 선물, 그리고 착한 아이·나쁜 아이의 중심에는 공통적으로 어른이 존재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존재인 산타클로스의 정체는 어른이었으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주체도 어른이고, 아이들이 산타의 리스트를 통해 착하게 굴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어른이다. 아이들을 위한 동심 가득한 전통으로 여겨지는 산타클로스 설화는 궁극적으로 어른과 사회를 위한 것이다. 산타클로스는 물리적으로 지구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의 사회 속에서는 명확한 형태를 띠고 사람들, 그 중에서도 힘 있는 어른들의 입에서 출발하여 착한 아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어 아이들에게 부담을 가한다. 아이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준을 제시하여 선별된 일부 아이들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서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이미지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산타클로스의 원형을 이루는 니콜라우스 주교의 선행의 대상에는 이런 조건이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산타클로스 설화는 사회의 편의에 따라 재구성되어 사회 속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산타클로스의 리스트 너머를 바라볼 때가 되었다. 리스트 너머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아이들이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을 사회적 기준으로 구별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용, 배려하는 마음으로 아이들 모두를 포용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어린 아이일 때가 있었고, 누군가의 배려와 관용,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에 존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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